서울신문 연혁

서울신문은 국내 현존하는 언론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구한말 일제의 탄압에 맞서 항일구국운동을 펼친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를 계승한 서울신문은 우리 민족사와 영욕을 같이해 왔습니다. 과반세기를 이어온 정부 소유 구조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원조합 참여 등 민영화를 통해 공익정론지로 재탄생한 서울신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900년 전반

1900년 후반

2000년대

2010년대

1900년대

1904년 6월 29일
러일전쟁 취재차 영국의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서울 특파원으로 왔다 해임된 배설(본명:Ernest Thomas Bethell)과 토머스 코웬, 그리고 고종의 영어 통변인(통역사)이었던 양기탁이 ‘코리아 타임스(The Korea Times)’라는 이름으로 첫 영자신문 시험판을 제작.
1904년 7월 18일
시험판 제작 이후 배설(초대 사장), 양기탁(총무)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라는 한글 2면과 영문 4면의 총 6면으로 된 2개 국어 합본 신문을 발행. 영문판 제호는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
1905년 8월 11일
한문에 익숙한 유생들을 위해 한글판을 국한문판으로 바꾼 대한매일신보 4면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 4면으로 나누어 2개 신문을 분리 발행.
1905년 11월 27일
굴욕적인 을사조약 체결을 비판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황성신문의 장지연의 체포 및 신문 정간 사건을 종합 정리해 한문과 영문 양면으로 된 호외를 발행, 을사조약 체결 진상을 전국에 알림.
1906년 2월 10일
고종이 배설에게 신문 및 통신에 관한 전권자로 위임한다는 친필 특허장을 내리고 매월 운영 경비를 보조.
1907년 1월 16일
1906년 12월 1일자 영국 트리뷴지에 실린 고종의 밀서 사진을 복사, 전재함으로써 고종의 밀서가 진실이었음을 주장하고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비판.
1907년 2월 21일
대구민의소의 ‘국채 1300만원 보상 취지서’ 전문 게재와 함께, ‘이천만 동포 가운데 조금이라도 애국 충정이 있는 사람은 이에 적극 참여해 달라.’며 국채보상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이후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결성하여 의연금을 접수·관리.
1907년 5월 23일
양기탁과 안창호가 뜻을 모아 국내 최대 항일 민족단체인 ‘신민회’ 본부를 영국인이 대표로 있어 치외법권인 대한매일신보 안에 두고 신민회 기관지를 자임, 5월 23일자부터 새로 한글판을 창간하여 민족계몽 교육운동에 앞장섬. 이로써 대한매일신보는 국한문판, 한글판, 영문판의 3개 신문을 발행.
1907년 7월 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의 고종이 보낸 3명의 특사 소식을 알림.
1907년 7월 18일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친일내각이 일제의 고종 퇴위 방침을 받아들여 고종이 어려움에 처했다는 호외를 발행, 대신들의 파렴치한 행태와 고종의 거부 상황을 보도.
1907년 8월 18일
일제의 술책인 정미7조약에 따라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가 의병으로 봉기하자 ‘의병소식’이라는 난을 따로 만들어 전국의 의병활동을 집중 보도하는 등 이후 날마다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봉기와 의병무장투쟁 소식을 보도하여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
1908년 3월 6일
지금의 관보는 더 이상 한국인을 위한 소식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한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대한매일신보 내의 정부 인사동정을 싣던 관보와 관정록사(官廷錄事)란을 폐지하고 그 지면에 애국계몽운동가와 계몽단체의 교육구국 활동을 주제로 한 ‘학보·학계’ 소식을 게재.
1908년 5월 27일
국한문판 8143부, 한글판 4650부, 영문한 463부 등 총 1만 3256부를 발행하는 국내 최고의 신문으로 자리매김.
1909년 5월 1일
배설, 건강 악화로 37세의 나이에 사망.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永生)케 해 한민족을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김.
1909년 12월 2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약력과 수감생활, 재판상황 등을 연속 보도하는 등 언론구국투쟁에 앞장 섬.

1910년대

1910년 5월 21일
일제 통감부가 2대 사장 만함(Alfred W. Marnham)에게 700파운드를 주고 대한매일신보를 인수. 대외적으로 통감부는 인수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6월 14일 발행인 및 편집인을 이장훈으로 변경. 이에 양기탁을 비롯한 신민회 동지들 모두 대한매일신보를 떠남.
1910년 8월 28일
국·한문판 1461호, 한글판 938호를 끝으로 한일병탄과 함께 대한매일신보 폐간, 통감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의 일개 부서로 통합됨. 폐간 전까지 대한매일신보는 국한문판 24차례, 국문판 21차례의 압수와 2차례의 정간처분을 받는 등 항일구국지로서의 독보적인 족적을 남김.
1910년 8월 30일
제호가 ‘매일신보(每日申報)’로 바뀌고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은 계속 이어졌으나(국·한문판 1462호, 한글판 939호) 한일합방 사유를 국민에게 알리는 순종(純宗)황제 조칙(詔勅)과 칙유(勅諭)를 1면에 크게 보도하는 등 총독부 입장을 대변하고 일제의 한반도 통치 합리화를 선전하기 위한 황국신민화의 도구로 전락.
1910년 11월 11일
104세 최장수 이춘광옹 부부 사진을 신문에 최초로 게재, 이후 정적인 뉴스사진에서 동적인 뉴스사진으로 전환하는 계기 마련.
1918년
우리나라 최초로 기자 공개채용 실시, 홍난파(洪蘭坡)와 유지영(柳志永)이 기자로 발탁.
1919년 8월
소설작품 현상 모집을 최초로 실시, 신춘문예의 효시가 됨.

1920년대

1920년 7월 2일
부인기자 채용 사고(社告)를 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인 이각경(李珏璟)이 9월 5일 정식발령을 받고 매일신보 기자로 활동. 당시 응시자격은 ①가장(家長)있는 부인 ②20세 이상 30세 이하 ③고등보통학교 졸업정도 이상으로 문필취미가 있는 부인이었음.

1930년대

1937년
시민들에게 빠르게 뉴스를 전달하기 위해 종로 화신백화점 옥상에 전광속보대 설치.
1938년 4월 29일
경성일보 산하에 있던 조직을 독립, 주요 경영진이 모두 한국인으로 바뀌고 매일신보 제호 한자를 ‘신(申)’에서 ‘신(新)’으로 변경. (每日新報)
1938년 6월 30일
매일신보 경영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역대명가유필진적(歷代名家遺筆眞蹟)’이라는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과 글씨체를 소개하고 전문가의 설명을 곁들인 별쇄 부록판을 총 8회에 걸쳐 발행. 당시 일제의 극심한 언론탄압과 총독부 산하에 있던 매일신보의 상황에서 보면 굉장히 이례적인 사건임.

1940년대

1945년 11월 22일
해방 후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오세창이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며 매일신보를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변경. 대한매일신보의 위대한 유산과 매일신보의 아픈 유산을 모두 물려받는다는 취지로 ‘혁신 속간’이라는 소개와 함께 지령 제13738호로 시작. (당시 하루 앞당긴 석간을 발행하여 발간일자는 1945년 11월 23일자)
1946년 2월
월간 시사·문화예술 종합지 ‘신천지(新天地)’ 창간. 광복 후부터 6·25전후에 이르기까지 종합지 중에서 첫손 꼽히는 대표적 중립적 종합지로 만 9년 동안 통권 68호를 발간, 신천지의 국판 크기는 훗날 우리나라 월간지의 판형으로 자리 잡음.
1946년 3월 9일
2월 6일자 사고를 통해 서울신문 상징마크를 일반독자에 공모, 서울 흑석동에 거주하는 한녹원씨의 작품이 당선되어 현재까지 사용 중.
가운데 자리한 펜촉은 언론·보도의 일반적 사명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 양편은 한 쌍의 학 날개가 하늘로 솟을 듯이 활짝 편 자세로 휘감고 있는데 바로 이것은 서울신문의 ‘서’자, ‘신’자 두 개의 시옷 자음을 변형한 아이디어로서 ‘해방된 민족의 대변기관’으로서 무궁한 발전을 약속하는 상징임.
1948년 10월 18일
우리나라 최초의 시사주간지 ‘주간(週刊) 서울’ 창간. 합동통신이 47년 7월 5일 발간한 ‘주간 서울’을 서울신문사가 인수, 지령 8호로 시작하여 49년 9월부터 잡지명을 ‘週刊 서울’로 확정하고 신천지와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시사교양지로 인기를 끌며 통권 93호까지 나왔으나 6·25 전쟁으로 발간 중단.
1949년 5월 3일
서울신문은 혁신 속간 이후 중립지를 고수했고 이후 광복 정부의 탄생을 축하하고 실정(失政)에 대해서는 비판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건국 직후 반공을 국시로 한 이승만 정부는 발행부수가 많은 서울신문이 반정부적이며 정부와 민간을 이간한다는 명목으로 공보처를 통해 5월 3일 정간 조치를 내렸고 결국 임시주총에서 중역과 편집진이 전면 경질되고 우익 진영 간부들이 배치되면서 6월 17일 국무회의에서 비로소 정간이 해제되고 6월 22일자부터 다시 발행됨.
이 정간조치로 인해 서울신문은 혁신 속간 이후 유지해온 중립적 논조를 반공 성향의 친정부적 논조로 바꿀 수밖에 없었으며 귀속주의 주주권리를 행사하는 정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고 52년 4월부터는 주총 정관개정으로 공보처장이 서울신문 회장을 겸하는 당연직 취임이 1960년대 자유당 정권 말까지 이어짐.
1949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최초로 조석간제(朝夕刊制) 실시.
1949년 10월
시, 동요, 동화에 국한되었던 당시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을 추가하여 4개 부문으로 확장한 새로운 형식의 신춘문예 공모를 시작, 6·25 이후 5년 동안 중단됐다 1956년 다시 부활해 한국문학을 살찌운 문단의 산실로 자리매김.

1950년대

1950년 6월 27일
6·25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신문은 26일 6차례, 27일 12차례의 호외를 발행, 북한의 남침 및 전황을 알렸고 중앙언론사 중 유일하게 간부진과 사원이 27일 자정까지 회사를 지켰으며 그 중 종군기자였던 한규호와 사장 비서 이승로가 피살되고 간부들이 납북되는 등 총 8명의 희생자 발생.
1950년 10월 1일
서울이 수복된 직후 중앙지로는 처음으로 수복 제1호 신문을 발행, 이듬해 1·4 후퇴 전까지 만 3개월 동안 신문제작에 임함.
1951년 1월 16일
부산에서 ‘서울신문 부산연락소’를 차리고 국제신문의 도움으로 신문을 재발행했으나 상황이 악화되면서 3월 8일자부터 휴간.
1951년 4월 6일
여타 중앙지들이 부산, 대구, 수원 등 후방에서 전시판 신문을 찍다 8월에야 서울로 복귀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서울 탈환 중이던 4월, 19명의 선발대가 태평로 사옥에서 목숨을 건 진중신문을 발행(4. 6 ~ 4. 24), 서울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음.
1954년 1월 1일
‘자유부인(정비석 작가·김영주 화백)’이 서울신문에 첫 연재를 시작, 이후 8월 6일까지 215회에 걸쳐 연재되며 한국 신문연재 소설 사상 최고의 뜨거운 화제작이 됨.
1956년 10월 18일
제작비 부담을 무릅쓰고 한자 문어체가 아닌 본격적인 ‘한글판 서울신문’ 발행. 58년 9월 10일부터는 한글판 서울신문 편집부 신설, 본격적인 한글 전용 신문제작에 나섰고 발행 3주년인 59년에 이르러서는 학생들을 위한 신문으로 성격을 탈바꿈했으나 60년 4월 19일 사옥이 전소되면서 한글판 발행이 중단.
1958년 10월 1일
회사의 경영압박으로 1954년 ‘신천지’와 ‘소년서울’ 발행을 중단하고 서울신문 제작에 총력을 기울여 55년 4월 1일부터 석간 4면, 58년 7월 10일부터 석간 6면, 10월 1일부터는 조석간 8면(조간 4면, 석간 4면)을 발행, 이후 각 중앙지들이 12월부터 이를 따라해 조석간 8면이 신문업계에서 일반화 됨.

1960년대

1960년 4월 19일
자유당 정권의 기관지로 낙인찍힌 서울신문에 대한 분노로 4·19 시위대의 방화가 발생, 서울신문 사옥 및 반세기에 걸쳐 보관해 온 10만 장 이상의 사진자료, 윤전기, 집기 등이 전소되고 이어 25일에 휴간.
1960년 7월 27일
사옥 방화 사건 이후 임시주총을 통해 경영진을 재정비하고 조석간 8면으로 속간 발행이 시작되었으나 경영난이 악화되면서 10개월도 안된 이듬해 5월 9일 임금 미지급 등으로 인한 파업으로 다시 휴간에 돌입하게 됨.
1961년 12월 21일
자금조달에 성공하여 불에 탄 서울신문 사옥을 개축하고 21일 석간부터 다시 속간호를 발행, 조석간 8면에 월요조간 4면을 포함, 연중무휴 주 56면 발행이 시작됨.
1968년 4월 27일
서울신문사는 선열들의 애국충절을 오늘에 되새기며 내일의 조국을 조망하기 위해 1966년부터 1972년까지 15기에 달하는 ‘애국선열 조상 건립사업’을 펼쳐 그 첫 번째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세종로 네거리에 세워지게 되었고 이어 14기의 동상이 72년까지 순차적으로 세워졌으며 이후 동상 관리권을 서울특별시 또는 유관단체로 이관함.
1968년 9월 22일
대중문화의 확산에 일대 기여를 한 국내 최초의 책자형 주간지 ‘선데이서울’ 창간, 창간호 6만부가 발간 2시간 만에 완전 매진되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거두며 사세 신장에 크게 기여해 78년에는 20만부를 돌파하는 등 타지의 추종을 불허하며 최고 부수와 최고의 광고수입을 올림.
1968년 11월 22일
국내 일간지로서는 유일하게 전 지면의 한글 전용을 단행, 타사에 앞서 한글 전용을 선도함으로써 문자 생활을 간편 합리화하는 데 앞장섰고 이후 70년 2월 14일 ‘신문말 다듬기 위원회’를 상설기구화 하여 1600여개에 이르는 한자어를 한글화하는 등 한글 현대화에 이바지 함.

1970년대

1973년 11월 4일
고급 종합 지성 주간지 ‘서울평론’ 창간, 신문지면에서 보도하기 힘든 핫 이슈의 심층토론 같은 콘텐츠를 선보였으나 당시는 그러한 수준의 고급 지성지를 수용할 만한 시장여건이 되지 못해 안타깝게도 2년 만인 75년 11월 6일자 103호로 휴간됨.
1974년 10월 25일
박정희 정권의 무리한 언론 탄압에 맞서 ‘기자 선언’ 결의, 언론자유를 위한 의지를 표출했으나 정부 지분이 대주주인 소유구조의 한계가 또다시 빌미로 작용해 결국 70년대 유신시대에 정부기관지 역할을 수행.
1975년 3월 30일
젊은 층을 겨냥한 스포츠 레저 오락 주간지 ‘주간스포츠’ 창간, 스포츠 전문지의 효시가 됨. 1987년 7월 29일자 제632호를 마지막으로 휴간.
1979년 6월 1일
김주영 작가의 장편소설 ‘객주(客主)’ 연재 시작, 1984년 2월 29일까지 1465회에 걸쳐 연재됐으며, 조선 말기 보부상을 비롯한 서민들의 애환과 역사를 담아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30여 년 만에 ‘객주’ 완결편을 2013년 4월 1일 ~ 8월 21일까지 서울신문에 다시 연재해 화제를 모음.

1980년대

1980년 12월 2일
석간에서 조간으로 발행이 전환되었고 81년 1월 5일자부터 8면에서 12면으로 증면.
1981년 7월 18일
국내 최초의 주간 TV연예 잡지 ‘TV가이드’ 창간, ‘젊은 잡지, 가족 잡지’라는 캐치프레이즈에 걸맞게 젊은 층이 가장 선호하는 잡지로 1980년대 최고의 부수를 자랑하는 잡지로 성장.
1984년 봄
계간 예술비평 전문지 ‘예술과 비평’ 발간, 예술 분야의 균형있고 활발한 비평과 개척적인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데 기여.
1985년 1월 1일
서울신문이 국내 최초로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로 신문을 제작하여 납 활자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신문 제작의 혁명을 선도.
1985년 1월 4일
1939년 3월 4층 건물로 준공된 태평로 사옥의 노후화 및 사세 신장으로 1981년 새로운 사옥 건립이 추진되어 1982년 4월 6일 기공식이 열렸고 서울신문은 을지로5가의 임시사옥으로 옮긴 후 3년 뒤인 1984년 12월 말에 신 사옥에 입주, 이듬해 1월 4일 시무식을 가졌고 서울신문·프레스센터 준공식이 4월 6일 열리면서 태평로 시대 개막..
1985년 6월 22일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앞두고 국내 최고의 스포츠 신문인 ‘스포츠서울’ 창간, 70만부의 창간호가 30분 만에 매진되는 등의 기록을 남겼으며 신문 100년사에 여러 측면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
1. ‘주관적인 스트레이트 기사’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기사 형식을 창조
2. 국내 최초로 전면 가로쓰기 단행
3. 한글 전용 신문
4. 국정교과서의 표기법을 채택해 세로쓰기 신문의 폐단 일소
5. 매일 4도 컬러인쇄 발행, 흑백 위주의 신문에 혁신적인 변화
6. 취재기자 및 편집기자의 이름을 지면에 명기, 기사의 책임감 강조
1988년 4월 13일
서울신문 노동조합 설립총회 개최, 노동조합 본격 출범.
1989년 9월 23일
노동조합이 사원지주제 전환을 목표로 시작된 노사 단체교섭이 18차례나 계속되었으나 편집국장 임면동의제, 사원지주제, 임금인상 등 주요 사안이 결국 결렬되면서 노조가 파업에 돌입, 26일간이나 파업이 계속됨. 이후 극적인 합의로 10월 19일 0시를 기해 파업이 해제.

1990년대

1990년 7월
6월 23일 여성 월간지 ‘퀸(Queen)’ 창간.
1991년 7월 31일
부수 증가와 외간물 인쇄 폭주로 인쇄시설 확충 위해 서울신문 구로 제2공장 준공.
1991년 12월 31일
지령 1192호를 마지막으로 ‘선데이서울’ 휴간, 이어 1992년 1월 5일 ‘피플’이라는 뉴스 인물 주간지 창간, 11월 5일자 지령 43호부터 제호를 ‘뉴스피플’로 바꿔 본격적인 시사 주간지로 발돋움.
1992년 5월 13일
영호남권의 신문 현지제작과 보급체제를 갖추기 위해 서울신문사 대구 인쇄본부 건립, 수도권과 비슷한 시간에 신문 배달이 가능해짐.
1993년 6월 1일
서울신문, 스포츠서울, TV가이드, 뉴스피플 등 모든 매체의 기사 작성 및 송고를 컴퓨터로 처리, 전면적인 기자입력 시대를 선언함으로써 원고지 시대의 종말을 고함.
1995년 11월 22일
인터넷 뉴스 서비스인 ‘서울신문·스포츠서울 뉴스넷’ 오픈, 이후 1999년 11월 18일 독립법인으로 분사.
1996년 10월 1일
전면 가로쓰기 단행.
1997년 11월 20일
1995년 400억원의 증자를 통해 자본금을 확보한 서울신문은 세계 최초로 타워형 샤프트리스 윤전기를 도입, 취재에서 강판, 인쇄에 이르는 전 과정의 완전자동화를 구축.
1998년 10월 19일
서울신문 노사 양측이 ‘편집권 독립을 위한 노사 공동 선언문’에 합의.
1998년 11월 11일
서울신문 제호를 ‘대한매일’로, 사명을 ‘대한매일신보사’로 변경.
1999년 12월 30일
스포츠서울을 독립법인 ‘주식회사 스포츠서울21’로 분사.

2000년대

2000년 10월 18일
소유구조 개편, 경영혁신, 지면혁신을 골자로 한 ‘대한매일의 새출발을 위한 노사합의문’ 채택, 정부소유 언론의 굴레를 벗고 민영화의 길로 전환해 독립 정론지로서의 초석 마련.
2000년 11월 1일
독립언론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사 공동으로 편집국장 추천위원회 구성, 후보 추천 후 편집국원 투표로 초대 직선 최홍운 편집국장 선출.
2001년 6월 11일
정부에 제시한 대한매일신보사 민영화 방안이 계속해서 표류하자 6월 11일 대한매일 노조가 전면적인 투쟁 국면으로 전환하면서 사옥 앞 철야농성과 문화관광부 릴레이 1인 시위 등을 계속하며 정부를 압박, 결국 문화관광부가 방안을 수용하여 10월 11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기존 주주 주식 53%를 감자하고 상여금과 복지수당 대폭 삭감, 퇴직금 누진제 포기 등 사원들의 희생으로 우리사주조합의 주식매입 대금을 마련.
2002년 1월 15일
대한매일신보사 우리사주조합이 1대 주주로 올라서며 민영화 1단계 작업을 마침내 완성. (우리사주조합 39%, 재정경제부 30.49%, 포스코 19.4%, KBS 8.08%, 금호문화재단 3%)
2002년 3월 13일
2월 4일 사고에 사장 공모를 알린 후 38명의 후보가 접수됐고 최종적으로 유승삼 후보가 대한매일의 첫 민선 사장에 취임.
2004년 1월 1일
2003년 12월 3일 임시 주주총회에서 대한매일에서 다시 ‘서울신문’으로 제호 환원을 의결, 새해 1일부터 다시 ‘서울신문’으로 발행. 제호 디자인을 대한매일신보가 생략된 의미의 축약 부호를 붙인 으로 함으로써 서울신문이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정신과 지령을 계승했음을 나타냈음.
2004년 1월 9일
타블로이드판 주말매거진 ‘We’ 매주 1회 발행. 본격적인 주5일제의 시행으로 주말 여가 시간이 늘어난 독자에게 각종 레저와 여행, 생활정보, 대중문화 소식 등을 전달.
2004년 6월 1일
타블로이드 수도권섹션 ‘서울 in Seoul’ 주 2회 발행. 서울과 수도권의 특화된 지역소식, 시장과 쇼핑상가, 학교 등 생활현장의 이야기를 전달. 10월 15일자부터 제호를 ‘Seoul in’으로 바꿈.
2004년 7월 18일
대한민국 언론사 중 최초의 창간 100주년을 맞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위기의 DMZ 생태계 대탐사, 희귀병 어린이 돕기 캠페인, 하이서울 한강마라톤대회 및 서울신문하프마라톤, 서울현대도예공모전 등 8건의 큰 행사와 서울신문 100년사 편찬, 본사 1층 로비에 배설·양기탁 선생 흉상 건립 등이 추진됨.
2007년 4월 25일
서울신문의 첫 인터넷 브랜드 뉴스 ‘나우뉴스’ 오픈. ‘세계에서 본 한국, 한국에서 본 세계’라는 컨셉으로 지구촌의 신기하고 재미있는 뉴스를 제공.
2007년 7월 18일
전라남도 무안에 시간당 최대 1MW를 생산하는 태양광발전소 ‘무안솔라토피아’ 준공.
2009년 10월 13일
서울신문과 케이블 교양채널인 성공TV가 공동경영 협약을 맺고 채널명을 ‘서울신문 STV’로 변경, 본격적인 멀티미디어 그룹 체제 시작.

2010년대

2010년 12월 9일
서울신문 모바일 웹(m.seoul.co.kr) 오픈. 스마트폰 기종에 상관없이 누구나 모바일 웹브라우저를 통해 서울신문 기사를 볼 수 있는 본격적인 모바일 뉴스 서비스 시작.
2014년 2월
두 번째 태양광발전소인 장흥솔라토피아 인수.
2014년 4월 1일
다음 날 신문을 전날 저녁 PC, 스마트폰 등에서 미리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 초판 서비스 ‘서울신문 프리미어 에디션(Premier Edition)’ 실시.
2016년 7월 18일
창간 112주년을 기념하며 서울신문 사옥 앞 지상주차장 공간을 광장과 공원이 어우러진 ‘서울마당’으로 새롭게 조성, 시민에게 개방.
2017년 2월 6일
공무원 사회의 인사와 복지, 처우, 건강, 은퇴 이후의 삶, 재테크 등 다양한 이슈를 심층 보도하는 공무원 프리미엄 월요 매거진 ‘퍼블릭 IN’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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