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대
1904년 6월 29일
러일전쟁 취재차 영국의 데일리 크로니클지의 서울 특파원으로 왔다 해임된 배설(본명:Ernest Thomas Bethell)과 토머스 코웬, 그리고 고종의 영어 통변인(통역사)이었던 양기탁이 ‘코리아 타임스(The Korea Times)’라는 이름으로 첫 영자신문 시험판을 제작.
1904년 7월 18일
시험판 제작 이후 배설(초대 사장), 양기탁(총무)이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라는 한글 2면과 영문 4면의 총 6면으로 된 2개 국어 합본 신문을 발행. 영문판 제호는 ‘코리아 데일리 뉴스(The Korea Daily News)’
1905년 8월 11일
한문에 익숙한 유생들을 위해 한글판을 국한문판으로 바꾼 대한매일신보 4면과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 4면으로 나누어 2개 신문을 분리 발행.
1905년 11월 27일
굴욕적인 을사늑약 체결을 비판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황성신문의 장지연의 체포 및 신문 정간 사건을 종합 정리해 한문과 영문 양면으로 된 호외를 발행, 을사늑약 체결 진상을 전국에 알림.
1906년 2월 10일
고종이 배설에게 신문 및 통신에 관한 전권자로 위임한다는 친필 특허장을 내리고 매월 운영 경비를 보조.
1907년 1월 16일
1906년 12월 1일자 영국 트리뷴지에 실린 고종의 밀서 사진을 복사, 전재함으로써 고종의 밀서가 진실이었음을 주장하고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비판.
1907년 2월 21일
대구민의소의 ‘국채 1300만원 보상 취지서’ 전문 게재와 함께, ‘이천만 동포 가운데 조금이라도 애국 충정이 있는 사람은 이에 적극 참여해 달라.’며 국채보상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이후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결성하여 의연금을 접수·관리.
1907년 5월 23일
양기탁과 안창호가 뜻을 모아 국내 최대 항일 민족단체인 ‘신민회’ 본부를 영국인이 대표로 있어 치외법권인 대한매일신보 안에 두고 신민회 기관지를 자임, 5월 23일자부터 새로 한글판을 창간하여 민족계몽 교육운동에 앞장섬. 이로써 대한매일신보는 국한문판, 한글판, 영문판의 3개 신문을 발행.
1907년 7월 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의 고종이 보낸 3명의 특사 소식을 알림.
1907년 7월 18일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친일내각이 일제의 고종 퇴위 방침을 받아들여 고종이 어려움에 처했다는 호외를 발행, 대신들의 파렴치한 행태와 고종의 거부 상황을 보도.
1907년 8월 18일
일제의 술책인 정미7조약에 따라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가 의병으로 봉기하자 ‘의병소식’이라는 난을 따로 만들어 전국의 의병활동을 집중 보도하는 등 이후 날마다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봉기와 의병무장투쟁 소식을 보도하여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
1908년 3월 6일
지금의 관보는 더 이상 한국인을 위한 소식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한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대한매일신보 내의 정부 인사동정을 싣던 관보와 관정록사(官廷錄事)란을 폐지하고 그 지면에 애국계몽운동가와 계몽단체의 교육구국 활동을 주제로 한 ‘학보·학계’ 소식을 게재.
1908년 5월 27일
국한문판 8143부, 한글판 4650부, 영문한 463부 등 총 1만 3256부를 발행하는 국내 최고의 신문으로 자리매김.
1909년 5월 1일
배설, 건강 악화로 37세의 나이에 사망.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永生)케 해 한민족을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김.
1909년 12월 2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약력과 수감생활, 재판상황 등을 연속 보도하는 등 언론구국투쟁에 앞장 섬.